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r1 문단 편집)
이 문서는
이 문단은
토론
을 통해 다음의 합의사항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주딱
의 기분에 따라 제재될 수 있습니다.
아래 토론들로 합의된 편집방침이 적용됩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주딱
의 기분에 따라 제재될 수 있습니다.
[ 내용 펼치기 · 접기 ]
토론
- 합의사항1
토론
- 합의사항2
토론
- 합의사항3
토론
- 합의사항4
토론
- 합의사항5
토론 합의사항
[ 펼치기 · 접기 ]
본 문서 리다이렉트 중,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헝", "오헝 제국", "이중 제국",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을 존치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헝제국"을 삭제한다.
"삼중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등의 문단 리다이렉트 또한 존치한다.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제국의회에 대표되는 왕국들과 영토들|시스라이타니아]] === 오스트리아는 '''법적으로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사상을 강하게 억압했다. 하지만 오랜 다민족 국가의 역사와 소수민족 통치 경험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에 관대한 나라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심각한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런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통제와 느슨한 집행 방침을 당대인들은 '슐람페라이(Schlamperei, 엉터리)'적 관행이라고 불렀다. 검열은 형식적이었고, 수많은 글에서 여러 사상가와 (심지어는 아나키스트도) 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운동가인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오스트리아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활동했다. 특히 스탈린은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동안 민족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그 자신이 [[조지아]] 출신이고 러시아도 오스트리아처럼 다민족 국가였다.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의 밑에서 일할 때부터 소비에트 정권에서 소련 내부의 민족문제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1907년 남성 보통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 오스트리아 쪽 제국의회의 정당 구성을 보면 과격한 [[내셔널리즘|민족주의]] 세력이나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까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온건 [[사회민주주의]] 성향이기는 하지만 '''[[사회주의]] 정당'''인, 빅토어 아들러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오스트리아 원내 제1당이었다.[* 이웃한 [[독일 제국]]에서도 [[빌헬름 2세]]가 합법화시킨 이후 사회민주당이 주요 정당으로 등극하고 1912년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되었을 정도로 당시 유럽 전반에서 사회주의가 유력하기는 했다.] 제국 내 소수민족인 체코인이나 이탈리아인 등도 의정활동에 참가했다. 체코계 의원들은 [[보헤미아 왕국]]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분리하여 헝가리와 비슷한 지위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1911년 제국의회에서는 이탈리아계 정당 소속 의원이 이탈리아계 영토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인]]이 많이 사는 곳은 제국의 대도시 중 하나였던 [[트리에스테|트리에스트]] 인근, [[달마티아|달마티엔]] 지역, [[쥐트티롤]]의 [[트렌토]] 일대였다.] 이런 자치권에 대한 의견관철과 논의는 당연하게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고, 소수민족 의원들은 종종 [[보이콧]]으로 맞서곤 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의회는 수시로 의정활동이 마비되었고, 의정활동보다는 황제가 직접 개입하여 칙령으로 통치와 행정이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개인에게는 업무부담이 과중되었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20세기 초 합스부르크 황실의 비극적인 가정사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일 중독|워커홀릭]]에 경직된 권위주의적, [[가부장적]]적 인물이었음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슐람페라이적 관행 역시 그 단초를 제공했다 할 수 있다. 더 넓게 봤을 때, 당대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물론 이후의 중부유럽에서도 [[의회민주주의]] 정착이 지연된 것이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 지연이었다.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등은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 등 현대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다른 동구권 국가들 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서구로 편입되었다. 이들 국가들에서는 시민사회의 조직화와 정치참여의 전통이 이미 자리잡고 있어 즉각적으로 재활성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나 헝가리는 [[법과 정의당]]과 [[피데스]]의 막장 행각으로 민주주의가 확고히 자리잡은 게 맞느냐는 견해가 많긴 하다만 옛 유고연방이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구 소련권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성공적으로 서구 사회에 편입되었다.] 또한 이런 상황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가 의회민주주의나 소수민족의 정치적 권리에 환멸을 느끼고 나치즘을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느슨하고 관대한 통치에는 부작용이 뒤따랐지만 만약 소수민족에게 강압적인 통치를 한다면 즉각 문제가 생길 것이 명확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소수민족을 억누르는데 한계를 느끼고 헝가리인을 달래서 출범한 것이니, 소수민족을 무조건적으로 탄압하지 않고 잘 달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하고 건국된 다민족 국가 유고슬라비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왕국]] 시절부터 [[세르비아인]]이 우월 의식을 드러내며 다른 민족을 차별하였다. [[크로아티아인]]은 아예 [[추축국]]의 편을 들어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멸망에 일조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재건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가 민족주의를 억압하며 [[유고슬라브인|유고 내 모든 민족을 동등하게 만들려 했지만]] 국가 요직은 여전히 세르비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열흘 전쟁([[슬로베니아 독립 전쟁]])부터 시작해 [[코소보 전쟁]]으로 끝나는 [[유고슬라비아 전쟁|피비린내나는 전쟁]] 끝에 해체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슐람페라이적 관행을 마냥 잘못된 것이라 하기도 어렵다. 슐람페라이적 관행은 이중제국 체제 및 그 현상유지의 태생적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사회 보장 제도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제국의 관료들은 선진적인 복지 정책들을 도입했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당대 유럽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노숙자 같은 사람에게도 사회 보장의 혜택은 골고루 돌아갔고 몇년 간 직업이 없어도 노숙자용 무료 숙소에서 잠을 자고 무료 급식소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밖에 공립 대학이나 고등 교육도 무료였는데, 재능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파일:1200px-Felician-Myrbach,-Im-Wirtshausgarten-(1896).jpg|width=500]]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남녀 간의 교제 또한 상당히 자유로웠다. 19세기 말엽부터 여성들 사이에선 미혼, 기혼 상관 없이 젊은 군인과 짧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수백 년간 제국을 통치해온 합스부르크 왕조의 권위는 제국 내 국민들은 물론 다른 유럽인들에게까지도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정통성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합스부르크 제국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작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구조적으로 [[민족주의]] 세력에 호의적일 수가 없었고, [[소독일주의]]에도 반대했다.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통일 독일이 세워진다면 수가 적은 독일계로 소수민족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1850년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상 펠릭스 추 슈바르첸베르크 백작 등이 주창한 통일안은 '독일인들의 민족 국가'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영토를 신생 독일국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대(大)오스트리아주의에 가까웠다. >폴란드인이나 아일랜드인 같은 '억눌린 민족들(submerged nations)'이 독립을 위해 이미 투쟁하고 있기는 했지만, 서유럽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심지어 러시아에서도― 민족주의는 응집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전적으로 '억눌린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8세기에는 지배적인 독일계 엘리트 계층이 있었지만 심지어 이 독일인들에게도 이제는 북쪽에 새로운 독일 제국이라는 인접한 조국이 생겼다. 1867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억눌린 민족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마자르족에게 헝가리 왕국이라는 준 독립국 지위를 부여하여 스스로를 '이중 군주국'으로 재편했다. 헝가리 왕국은 독일인이 우세한 지위를 차지한 '오스트리아인들'과 군주(1848년 이래로 줄곧 통치한 프란츠-요제프 황제), 군대, 재정, 외교만을 공유했다. 독일인처럼 (그리고 사실 부다페스트에 국회의사당을 건립할 때 웨스터민스터 국회의사당을 본뜰 만큼 크게 찬탄한 영국인처럼) 마자르족은 스스로를 지배 민족이라고 여겼고 헝가리 왕국 내 슬라브 소수 민족들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이중 군주국 서쪽에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 북부(체코인), 북동부(폴란드인과 루테니아인), 남부(슬로베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의 슬라브족뿐만 아니라 신생 이탈리아 왕국이 탐내는 알프스 산맥 남사면의 이탈리아권(독일어권 [[쥐트티롤]]도 포함)을 다스렸다. 부다페스트의 거친 마자르족 소지주들과 달리 빈의 합리적 관료들은 피지배 소수 민족들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노력했고 독일인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 결과 빈의 정부 기구는 마비되고 황제가 칙령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풍성한 문화 융합은 분명히 빈을 지적·예술적으로 활기 넘치는 독특한 도시로 만들었지만 그곳의 지식인들은 우려와 함께 때로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미래를 내다봤다. >---- >-Michael Howard, <제1차 세계대전> 中 시스라이타니아의 소수민족들은 대체로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웠다.[* 심지어 [[폴란드 분할]]로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싫어하던 [[폴란드인]]도 여기에는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적어도 숨도 못 쉬게 탄압하는 [[독일 제국]]의 [[포젠]], [[서프로이센]]이나 [[러시아 제국]]의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령 폴란드]]보다는 나았으니까.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크라쿠프]]를 방문할 때마다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을 정도였다.] 예외적으로 체코는 조금 복잡했는데 [[독일/문화|독일화]]가 완료된 귀족 계층이나 [[주데텐란트]]의 독일계를 중심으로는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긍정하였지만, [[에드바르트 베네시]]처럼 처음부터 완전한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체코 민족주의가 활발했던 상공 시민계층을 중심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분리독립 움직임이 강해졌다. 물론 상공 시민계층이라고 모두 처음부터 분리독립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고, 훗날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국부]]로 대접받는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조차도 1916년까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보호 안에서 자치를 추구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사리크도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보헤미아 왕국이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재차 독립하면 [[범슬라브주의]]를 앞세우는 [[러시아 제국]]과 [[대독일주의]]를 내세우는 [[독일 제국]] 사이에서 체코인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합스부르크의 지배 하에서 자치를 추구하는 [[차악]]을 주장했던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견해에 동조했다. 체코 독립 후의 [[뮌헨 협정]]이나 [[프라하의 봄]]을 고려하면 팔라츠키가 구체화한 [[오스트로슬라브주의]]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체코인들의 분리독립이 전 계층에 받아들여진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이 임박하면서였다. >그러나 [[오스트로슬라브주의|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는 사실상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까지도 여전히 체코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Bartoš, J. et als. (1995) 267.] 1917년 1월 말까지도, 체스키 스바즈(Českého svazu)의 최고 회의에서는 두 번이나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1917년 1월 24일의 회의에서는 '우리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세계 대전 이후에도 체코 민족에게 속하는 모든 권리는 제국의 틀 내에서 그리고 오스트리아 군주국 내에서 성취될 것이다.'라고 했으며, 1917년 1월 31일 회의에서는 '체코 민족은 합스부르크의 군주국 이외에는 아무런 미래도 없으며, 발전의 조건도 찾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1917년 5월 30일 제국의회에 참여한 체코 의원들도 황제와 제국을 지지하면서 민족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연방 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Bakke, Elisabeth (1999) 185.] >---- >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향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문화적 자기 이해>, 김신규 언어적으로도, 시스라이타니아에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공용어가 없었고 1867년 기본법에서는 모든 민족과 언어의 평등을 공식 인정했다. 물론 독일계 위주로 나라가 굴러갔던 건 부정하기 어렵지만[* 19세기 말엽부터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체코어]]와 [[독일어]] 사용 문제로 사사건건 치고 박고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라이타니아의 다문화적 관용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가 빈 제국 의회인데, 의도적으로 소수민족 언어를 사용하여 [[필리버스터]]를 유도했고, 특히 체코인 의원들이 자주 이 방법을 써먹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